일상

어쩌면 마지막일 아빠의 오늘을 기록한다.

하우마치 2024. 1. 28. 18:56

 

 

20241월 어느날 아버지는 고열로 보훈병원에 입원하셨다.

작년 한해 아버지에게 서운한 날이 있어 1년 동안 아버지를 보러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 죽고나면 올거냐 하셨는데 거의 아버지 말이 맞게 되었다.

1년만에 전화를 받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응급실에서 병동의 집중치료실로 이동한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힘겨운 숨소리에 고통도 같이 묻어나왔다. 가래에 막혀 숨이 넘어갈듯했다.

임종 환자를 여럿 간병했던 간병인은 산소포화도가 어느 시점에 내려가면 급속히

내려가고 얼마지않아 임종한다고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그만 치료실에 온가족이 아버지가 좀 나아지길 기다렸다.

임종 면회라 시간을 조금 주었지만 가족들에게 모두 돌아가라는 말을했다.

간병인이 애타하는 엄마를 보며 할머니는 좀더 계시겠냐고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엄마는 계시라며 자기가 챙긴다고 한다.

아버지 챙기는것도 일인데 마음의병이 있는 엄마까지 챙기는거 힘들거 같아 내가

엄마를 챙기고 좀 더 있다가 가겠다고 양해를 받아 남게됬다.

아버지 옆에 앉은 엄마는 꼼작도않고 아버지를 지키며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은 잡고 눈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자신을 보라고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스러운 아버지는 양팔로 허공을 휘젓고 무언가를 부여잡으려 애썼다.

그르렁 거리며 숨이 넘어갈듯 가래 끓는 소리에 간병인에게 가래 제거를 요청했다.

오랜 고열로 목 안도 말라 피가 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당장 숨이 끊어질듯

몰아쉬는 숨소리에 숨이라도 편하게 쉬게 해드리고 싶었다.

간병인이 내 얘ㅁ기를 간호사에 얘기하고 의사의 오더가 내려져 아버지에 가래 제거를 했다.

너무 과도한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게 관이 목안으로 들어갔다.

고통에 아버지 몸의 휘어지고 내가 잡고있는 아버지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가래 제거를 한 후 아버지 숨소리는 편해졌다.

그런데 산소포화도가 34로 떨어졌다. 무서웠다. 이렇게 아버지가 가시는구나 기계의 숫자에

온 신경이 갔다.

좀처럼 숫자가 오르지 않았다. 아직 60 밑이다. 이렇게 1시간이상 유지되면 임종 준비를

해야한다고 했는데 큰 올캐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 사이에 숫자가 올라간다. 다시 올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간호사가 체온을 재러 왔다. 어제 밤 39도였는데 오늘은 종일 38.4였다.

간호사가 체온계를 보더니 정상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물었다. "몇도에요?' "36.5에요" 모든게 정상이다.

그렇게 한시간이 지난 후 엄마와 아버지를 뒤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간병인의 문자를 받았다. 전날까지 안나와서 의사로부터 장기손상에 대해 우려가 있다 들었는데 소변을 보기 시작했단다.

 

열은 좀 올랐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다고. 한가닥 희망(?) 아니면 임종전 반짝 좋아지는걸까?

어쨌거나 그런 하루가 지났다. 그날 오후 간병인이 문자가 왔다. 어버지 등에 욕창이 생겼다.

어제 고열로 움직이지 못했던게 원인인듯 했다.

간병인은 메디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올케가 엄마를 모시고 메디폼을 사가지고 갔다가 감염의 우려가 있으니 병원방문을 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에 나까지 가서 간호사가 예민해졌다.

코로나 이전엔 병원에 수시로 가족들이 환자와 교감했다. 나는 생각했다 하루가 힘든 환자에게 가족과의 교감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게 할텐데 특히 우리 아버지처럼 가족에 관심이 절대적인 사람에게 가족과의 분리는 질병의 고통만큼 괴로운 일이리라.

우리 형제가 다녀가고 하루는 아직 아버지 상태가 아주 나쁜 상태는 아니였다. 검사 결과도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오빠에게 의사가 전했단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39라고 한다. 오후에 의사가 전화하고 간병인도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신다고 했다.

아이스팩과 물수건으로 열을 내리게 하고 해열제도 쓰고 있단다.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에 오빠와 내가 사인을 했으니 딱히 할수 있는치료법은 없다.

아버지가 스스로 병을 이겨내시는 방법밖에 아흔하고도 두살이나 되신 아버지에게 너무 힘든 그일이지만

다음날 일찍 퇴근하고 몸이 안좋아 병원에 들러 집으로 갔다. 한시간쯤 자고 일어났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잠 잘 준비를 해서 엄마집에 내려갔다. 대문을 지나 계단에 오르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계단까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가 통곡하고있다. 아이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에게 왜 우냐고 물었더니 올캐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단다.

내가 아니라해도 엄마는 소리지르며 지금 전화가 왔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올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일인가 물었다.

올캐는 엄마가 전화를 하셨는데 아버지가 왜 안오시냐고 화를 내시며 전화를 끊었단다. 종일 아버지 생각에만 빠져 있는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자식들이 감추고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생각이 들었는지 며느리에게 왜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지 화를 내고 당신 생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것으로 확신하셨나보다.

나는 처음 병원에 간날 아버지와 엄마의 사진을 찍어 두었었다. 갤러리에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며 병원에 갔던일을 얘기하니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서 울음도 그치고 기분도 나아졌다.

엄마에게 바깥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고 했다. 평소같으면 싫다실텐데 알았다며 따라 나선다.

엄마와 시장통을 걸어갔다. 작은 가게에 센베이에 눈을 두는 엄마에게 돌아오는길에 사가지고 가자고 달래서 운동을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과자를 사러 갔다. 폐지를 줍은 할머니 한 분이 과자를 하염없이 보다가 우리가 과자를 사려하니 자리를 비켜주신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서 검정봉지를 하나 얻었다.

엄마의 과자를 할머니에게 조금 나눠주었다. 할머니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과자봉지를 받아드셨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과자를 작게 잘라 내게 주신다.

그날 엄마는 자정을 넘겨 같은 얘길 묻었다 아버지 나이가 몇살인지 아버지는 어떨거 같은지 처음엔 늦었으니 주무시라 했지만 아버지가 입원한 동안 이야기 상대 없이 혼자 벽을보며 앉아있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말 상대인 내게 무한정 말을 쏟아내는게 다행이다 싶기도했다

새벽 깊은 시간 병원에서 내일 임종 면회를 오라는 알림을 받았다. 아침에 집에 올라가 준비를 하고 내려와 엄마에게 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좋아서 얼른 씻고 준비를 마치셨다.

오창에서 온 동생까지 그런데 집중처리실이 아닌 일반실에서 아버지 면회를 했다.

의사의 말과 달리 밤새 이벤트가 있었던 아버지는 약간 열이 내린 상태로 가족들을 알아보신다. 그중 엄마와는 눈도 마추고 엄마가 집에 간다니까 싫다고 고개까지 젓는다.

짧은 임종 면회를 마치고 나왔다. 상태가 좋아진게 좋긴했으나 언제까지 이렇게 짧은 면회를 해야 하는건지 가족 면회가 자유로웠던 예전엔 매일의 상황을 회진때 알려주었었는데 가족ㅍ면회도 자유롭지 않은데 그날 그날 상황도 알려주지 않고 이렇게 상태가 안좋다며 오라해서 와 보면 상황이 다른 상태가 생기니 답답했다.

최소 그날 상황은 그날 들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간병인에게 아버지 상태가 좋아지면 엄마와 화상통화를 할수 있도록 해달라 부탁했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못잤는데 아침에 전화벨이 울렸다. 간병인이 아버지가 어제 밤부터는 열이 안나고 눈도 뜨고 있다며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시라고 한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엄마집으로 달려갔다.

화상 전화를 거니 저쪽에 눈을 뜨고 있는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간병인이 아버지에게 엄마와 영상통화를 해주며 '보고싶다'고 해보라 한다.

숨이 차는 갈라진 목소리지만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고싶다고 했다.

그 병원에 입원한 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잠깐의 통화였지만 희망이 생겼다.

내일도 아무일 없이 열이 내리고 혈압이 정상이되고 염증도 잡혀서 곧 퇴원할수 있기를 희망해본다.